한국
불상(佛像) 개관(槪觀)
99 김성희
1. 불상이란?
불상(佛像)이란 붓다(Buddha:佛陀)의 형상을 회화·조각 등의 조형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찰 안에는 여러 부처님을 모셔놓은 불전(佛殿)들이 있는데, 이 불전 안에 봉안된 부처들을 통칭해서 불상이라 부르고 있다.
불상들은 나름대로 각기 다른 교리적 배경을 갖고 있는데 이것을 불격(佛格) 또는 덕이라 한다. 불격은 각 상마다 모두 있게 마련이고 또 그 격을 달리한다. 이 격은 크게 불상(佛像)·보살상(菩薩像)·조사상(祖師像)·신장상(神將像) 등 네 가지로 나뉜다.
불상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이고 최고의 경지인 깨달은 이(覺者)를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보살상은 깨달음은 얻었지만 아직 중생제도를 위해 붓다가 되기를 잠시 보류한 보살을 형상화 한 것이며, 조사상은 붓다님의 직제자와 지금까지의 덕이 높은 모든 스님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제각기 격을 달리하는 4종류의 불상이 있는 셈인데, 엄밀한 의미로 불(佛)이란 여래(如來)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불상이라 하면 여래의 상(像)을 의미한다. 이렇게 불상이라는 불격이 따로 있기 때문에 엄격히 말해서 모든 불교의 상을 그냥 불상이라 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따라서 불교의 상들을 통틀어 말할 때는 불교상이라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불상은 불교상 전체를 뜻하는 것이기도 해서, 실제로는 넓은 의미에서 그 모든 것을 포함하여 불상이라고 한다.
2. 불상의 기원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卷 28}의 기록에 의하면, 석가 재세시에 코삼비국(賞彌國)의 우전왕(優塡王)과 코살라국(拘隆羅國)의 파사익왕(波斯匿王)이 각기 전단목(檀木)과 자마금(紫磨金)을 사용하여 불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대승불교 경전에서 보편적으로 언급되는 불상기원설이지만, 남전(南傳) 계통의 증지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후세에 첨가된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붓다가 열반한 후 약 500년 동안은 본생도(本生圖), 불전도(佛傳圖) 등에 붓다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 전혀 없고, 붓다가 주인공인 장면에서 붓다가 있어야 할 자리는 비워두거나 다른 상징물로 대신한 점으로 보아 불상의 제작은 그 이후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붓다가 있어야 할 자리에 붓다를 표현하지 않는 불상 표현의 원칙이 지켜지던 시기를 무불상시대(無佛像時代)라고 한다. 이 무불상시대에 예배의 대상은 붓다의 사리(舍利)를 봉안한 탑파였다. 불교신자나 승려들은 탑 주위에 모여 탑에 대해 예배하였고, 그 후 1세기경 인도의 두 곳에서 거의 동시에 각각 다른 동기에 의하여 불상이 제작되었다. 한 곳은 간다라 지방이고, 다른 한 곳은 마투라 지방이었다.
1) 간다라 양식
인간의 형상을 닮은 불상은 인도 서북부 인더스강 유역의 간다라 지방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간다라 지방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은 곳으로, 불상의 제작 역시 신(神)을 조각하던 그리스의 전통이 유입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스 풍의 자연주의·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 당시 불상의 특징은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머리카락은 고수머리가 아니고 물결모양의 장발이며, 용모는 눈언저리가 깊고 콧대가 우뚝한 것이 마치 서양사람과 같다. 또한, 옷이나 자세 등의 모양은 형식화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습을 띄고 있다.
불상이 등장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지역을 지배하던 쿠샨 왕조가 대승불교를 신봉하였기 때문이다. 대승불교는 석가모니를 신적인 존재에서 완전한 인격체인 인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진취적인 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인간적인 모습의 불상이 등장하게 된다. 특히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은 대승불교와 간다라 양식을 발전시키고 동북아시아에 전파하는데 앞장섰다.
2) 마투라 양식
이보다 좀 늦게 인도의 중북부인 마투라 지방에서 인도 고유 전통을 기반으로 불상이 출현하였다. 교통의 요충지이자 종교도시로 유명한 이 지역은 불교와 자이나교가 성행했던 곳이며, 힌두교도에게는 크리슈나신의 탄생지로서도 숭배되는 지역이다. 이 곳에서 산출되는 적색 사암을 가지고 만들어진 마투라 양식의 불상은 상징적이고 엄격함이 강조되어 인도적인 예배대상으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3) 굽타 양식
인도의 불상은 그 뒤 굽타 왕조 시대에 이르러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불상 표현을 이루었다. 건강한 체구에 균형잡힌 신체 비례, 그리고 몸에 꼭 달라붙는 법의는 불법 자체가 불상에 응결되어진 것 같은 신성함을 보여준다.
굽타 이후 인도에서는 힌두교가 융성하게 되지만, 쿠샨 왕조 이후 불교는 중국, 우리나라, 일본 등으로 전승되면서 각 지역의 토착적 성격을 흡수하여 독창적인 불교문화를 이루게 된다
3. 불상의 전래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됨과 동시에 불상과 불경이 함께 들어왔던 것으로 보아 우리 나라의 불상의 역사는 불교 수용의 역사와 일치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언제부터 불상이 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보면, 6세기 말 백제의 사신인 심신이 불상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는 한반도 내에서 자체적으로 불상이 제작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불상은 1959년 뚝섬에서 출토된 것으로 5세기 초나 중엽 경의 중국 북위의 불상 양식과 유사하여 대체로 중국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불교가 전래된 초기 우리나라의 불상 양식은 대체로 뚝섬의 불상처럼 중국식 불상 양식을 모방하거나 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시대 불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미륵신앙의 영향으로 반가사유상이 유행하였다. 또한, 몸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며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있고 손과 다리의 조각표현에는 별로 입체감이 두드러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1) 고구려의 불상
현존하는 고구려 시대 불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예는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으로서, 이 불상은 현재 국보 제 119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남 의령에서 출토되었지만, 불상에 새겨진 명문을 봤을 때, '연가'라는 연호는 고구려의 연호로 추정된다. 또한, '기미년'이라는 간지와 불상의 모습을 통해 대체로 539년 기미년에 제작된 것이 아닌가 추측되는데, 연도를 추정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불상의 모습을 살펴보면, 가늘고 긴 얼굴형이나 법의의 주름이 양옆으로 뻗쳐 약간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모습 등이 북위시대 6세기 초 불상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2) 백제의 불상
백제불상은 그 표정이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세련된 조형성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활발하고 역동적인 감각이나, 신라의 경직되고 둔중한 조형 감각과는 다른 뚜렷한 특징이다. 삼국시대 석조 불상은 대부분 암벽에 부조로 표현된 것이 많은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백제의 미소'라고도 불리는 국보 제 84호의 '서산 마애삼존불'이다. 특히 불상의 왼편에는 반가사유상을, 오른쪽에는 보주(寶株)를 두손에 마주 잡고 있는 보살입상을 거느리고 있는데, 이 두 보살상은 삼국시대에 유행했던 보살상이며, 양쪽에 두 보살을 대동한 배치는 중국이나 인도에서는 보기 힘든 형태이다. 오른쪽에 보주를 든 보살입상은 중국 남조 지역의 불상과 유사한 형태로 백제와 중국 남조의 문화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신라의 불상
삼국시대 말기인 7세기 중엽에 가까워지면, 불상의 입체감이 강조되고 법의의 표현도 자연스러워지며, 불상의 전면뿐만 아니라 측면이나 뒷면의 묘사에도 관심을 두는 등 그야말로 입체 조각으로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국보 제 78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은 삼국시대 가장 대표적인 반가사유상으로 7세기 신라의 금동불상이 예술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많이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신체의 비례가 균형이 잡히고 세부 묘사가 구체적이며 늘어진 천이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 불상이 점차 조형적이고 균형 잡힌 형태로 변모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삼국시대 말기의 표현양식은 중국의 수나라에서 당나라 초기의 불상 양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4) 통일신라의 불상
삼국시대부터 숭상되던 불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정신적인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통일신라는 사원건축이나 불상 조성에 국가가 앞장섰던 불교 문화의 전성기였다. 통일신라의 불상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토착적 불교문화를 통합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교류가 활발하던 당과 서역, 인도의 외래 양식을 수용함으로써 독특한 통일신라의 불상 양식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통일신라 불상의 특징을 보면, 먼저 입상에는 여원인(與願印)과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수인(手印)을 보여주는 불상이 많고 약이 들어 있는 함을 든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국보 제 24호인 석불암의 본존불을 들 수 있다. 이 불상은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있지만, 존명(尊名)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석가모니 붓다라는 설, 아미타불<阿彌陀佛-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를 열고 그곳에서 법(法)을 설한다는 붓다를 이른다.>이라는 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연화장(蓮華藏)세계에 살면서 그 몸은 법계(法界)를 두루 차서 광명을 비춘다고 하는 붓다이다.>이라는 설, 아촉불<阿贈佛-불교에서 분노를 가라앉히고 마음의 동요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붓다이다.>이라는 설 등 다양하다. 석굴암은 이 본존불을 봉안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둥근 원형 천장과 좌우 대칭적인 불상 배치는 전체적인 구조를 안정되게 하고 있다.
토함산 동쪽 비탈면을 파고 인공으로 굴을 만든 석굴암은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진다. 또한, 석굴암의 본존불은 동해의 문무대왕 수중릉을 향하고 있는데, 이것은 붓다의 힘으로 신라를 지키겠다는 호국불교적 성격을 보여준다. 결국 석굴암은 신라인의 불교에 대한 신앙적 믿음과 호국정신, 그리고 조형적인 예술성을 갖춘 석조 미술품으로 볼 수 있다.
5) 고려의 불상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불교문화는 지방의 유력자인 호족들의 후원을 얻어 경주를 벗어나 고려 전역에 확대되게 된다. 따라서 불상도 지역적 특성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특히 고려의 불상은 신라에 비해 표현의 세련미나 신비감이 떨어지는데, 고려시대 들어 선종이 전파되면서 경전이나 불상 등의 조형물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거대한 석불이 조성되었는데, 이러한 석불은 대중들에게 예배의 대상으로 불교의 위엄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또한, 인간적인 모습의 불상이 만들어짐으로써 불교는 대중들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었다.
관촉사의 석조 보살입상을 보면 이러한 고려 불상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보물 제 218호로 지정된 이 불상은 높이가 18.12m로 우리나라 최대의 석조 불상이다. 특히 기둥같이 큰 몸체에 관을 쓴 이러한 형태는 충청남도나 전라북도의 석조불, 보살상에서 많이 나타나는 토착적인 불상 형태로 민간 신앙적인 면과도 밀착된 것으로 보인다
6) 조선의 불상
조선시대 불교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에 따라 전반적으로 침체된다. 그러나 불교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불교는 여전히 개인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 초기 불상은 고려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나, 점차 토착적인 성격이 강해지면서 국가적 차원이 아닌 개인의 행복이나 내세를 위해 소규모의 불상 제작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당시 불교가 사회적으로 공인되지 못함으로써 불상 역시 예배의 대상이라기 보다 형식적 대상이 되고 말았다. 임진왜란 이후에 제작된 불상은 비례나 조각 등이 답습적이고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다. 결국 조선의 불상은 이전시기에 비해 예술적인 면에서나 기술적인 면에서 모두 퇴보하였다.